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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제일검 척춘경의 1, 2차 여진족 토벌

jk-st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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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도깨비에서 공유가 맡았던 '대장군 김신'의 실제 모델이자, 고려의 역적이었고 최고의 권력이 누렸으며 인생 말년에는 수호신이었던 '소드마스터', '고려 제일 검' 등 무수한 칭호가 붙는 한반도 역사상 무력 최강의 장수 '척준경'의 여진족 토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척준경 유년기와 여진족 토벌

유년기

척준경은 고려시대 1070년대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척위공은 주리라는 지방직 공무원이었는데요, 조선시대에 아전과 같은 직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제대로 된 학문을 공부할 수 없었고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싸움을 하며 지내면서 성인이 되어서는 전국을 떠돌다가 경주지역 왕족의 종자(하인)로 들어가게 됩니다.

청년기

그 왕족은 고려 문종의 3남 왕희이며 계림공으로 불리었습니다. 후에 왕희는 몸이 약하고 어리던 조카 헌종을 몰아내고 1095년 고려 15대 국왕인 숙종이 됩니다. 척준경은 숙종으로 부터 남반이라는 말단 관직을 받게 되는데, 숙종이 계림공 시절 자신의 하인이었던 척준경에 대한 배려를 볼 수 있습니다.


1차 여진 정벌

숙종이 즉위한 지 9년이 지난 1104년 북쪽의 오랑캐인 '동 여진족'이 정주성(지금 함경남도 창신리 부근)으로 쳐들어 옵니다. 숙종은 여진족 토벌군 총사령관에 문하시랑 평장사(부총리급) 임간을 임명하여 출전을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고려군은 연전연패를 하며 정주성이 함락될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이때 척준경이 무기와 갑옷을 입힌 말 한필을 달라고 요청했고 지급받자마자 적진으로 달려가 적장 세명을 사살하고 포로가 된 아군 두 명을 구출해 내면서 급기야 여진족이 척준경의 위세에 눌려 후퇴하게 됩니다. 이 공으로 '천우위 녹사 참군사'라는 벼슬을 받게 됩니다.

이후 척준경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옥에 투옥되었는데, 이는 총사령관부터 장군들까지 패전에 이유로 모조리 파면당했는데, 말단 문관이 혼자 공을 세웠다며 지도층에 눈총이 나서 투옥되는 신세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고려의 여진정벌
고려의 여진정벌


2차 여진 정벌

2차 토벌군은 총사령관은 별무반 행여 대원수 '윤관'이 맡게 되었는데요. 윤관은 공을 세우고 옥에 투옥된 척준경이 안타까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게 됩니다. 옥에서 나온 척준경은 '녹사'라는 말단 군지휘관 직책을 맡게 되었고 2차 여진족 토벌군에 가세해 출정하게 됩니다.  

윤관이 이끄는 고려의 2차 토벌군은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 등 12군 17만 명이라는 대군이었습니다. 고려의 거이 모든 군사력을 동원한 전쟁이었죠. 1차 정벌에 실패에 대한 절치부심한 끝에 별무반 17만 명은 혹독한 훈련에 돌입합니다.

1105년 숙종이 사망하고 1106년 숙종의 아들 예종이 즉위하면서 아버지 숙종의 여진족 토벌을 이어가게 됩니다.

1107년 드디어 윤관의 2차 토벌군 출정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후 장춘이라는 곳에서 윤관은 여진족의 추장들을 불러 위장 연회를 베풀었고 이들이 술과 분위기에 취했을 때 척준경은 몰래 잠입하여 추장들과 호위병사 400명가량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위장 연회가 끝나고 나서 윤관은 별무반 17만 군사들과 함께  함경도로 진격하게 됩니다.


석성 전투

함흥 인근의 함주 성에서 농성하는 여진족과 대치하게 됩니다. 이 전투가 바로 석성 전투입니다. 윤관은 척준경에게 석성을 공격하라고 명했고 척준경은 '옥에서 구해주셨던 은혜를 입은지라 목숨 바쳐 싸우겠다'며 무기, 갑옷, 방패를 들고 석성을 기어 올라가 추장 수명을 사살하는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에 당황한 여진족들은 빠르게 무너졌으며 윤관의 총공격 명령에 고려군은 석성을 함락시키게 됩니다.

별무반은 토벌한 지역에 6개의 성을 보수하고 3개의 성을 신축하여 이를 동북 9 성이라고 명하게 되고 '윤관의 동북 9성 개척'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가한 목 전투

기세가 등등해진 고려군은 여진족의 유인책에 당해 적진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고 이때 여진족이 기습 공격을 하여 윤관은 100명의 병사와 함께 포위된 체 절체절명에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윤관의 포위 소식을 듣고 척준경은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잘 모셔라, 나는 나라를 모시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병사 10명과 여진족에 포위된 윤관을 구하고자 수천 명의 여진족의 포위를 뚫고 적진 중앙으로 달려듭니다.

척준경이 병사 10명과 시간을 벌었고 이후 기병대가 도착하여 포위된 윤관과 고려군 100명을 구하게 됩니다. 10명밖에 안 되는 병사를 이끌고 자신을 구하러 온 척준경에게 감명을 받은 윤관은 이후 척준경과 부자의 연을 맺게 됩니다.


영주성 전투

가한 목 패전 후 영주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는 고려군은 여진족의 명장 '알새'가 이끄는 20,000명의 여진족에게 포위를 당하게 됩니다. 윤관은 농성을 피자 했지만 군량은 거이 바닥이 나고 있었고 여진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어만 가고 있어던 터였습니다.

이때 척준경이 결사대와 함께 적진을 행해 공격하겠다고 했고 출전하여 여진족 19명을 사살하고 20,000명의 여진족을 후퇴시키는 기적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때 성에 있던 장수들은 성으로 돌아오는 척준경을 향해 절을 하면서 맞이했다고 합니다.


옹주성 전투 

고려군은 주력군은 영주성에 집결하였고 이를 간파한 여진족은 옹주 성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최홍 정이 정예병을 이끌고 성이 포위되기 전 성 밖으로 나가 공격하여 승리했지만, 수적으로 밀리는 상황이라 결국 성은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최홍 정은 척준경에게 밤에 성을 몰래 빠져나가 지원군을 이끌고 와달라는 부탁을 했고 척준경은 밤에 갑옷 하나 없이 맨몸으로 성을 내려와 포위망을 물리치고 정주까지 달려가서 지원군을 이끌고 통태진, 야등포, 길주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며 옹주 성에 도착, 여진족 주력군과 싸워 물리치고 옹주성을 구해 냅니다. 옹주성에 남아있는 백성들과 병사들은 척준경의 활약에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2차 여진 정벌도 실패

길고 긴 동북 9성 방어에 지친 고려군은 결국 1109년에 동북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게 됩니다. 그러나 척준경의 일신의 무력으로 대패를 면하여 협상을 할 수 있었으며 만약에 동북 9성에서 대패했다면 여진족은 고려의 개성까지 쳐들어올 기세였습니다. 고려의 전력을 확인한 여진족도 동북 9성을 양도받고 더 이상의 침공은 하지 못 했습니다. 결국 '소드마스터'이자 '고려 제일 검' 척준경의 1, 2차 여진 토벌로 인하여 여진족에게 고려 장수의 무력 수준과 공포심을 안겨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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