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맨해튼 프로젝트와 태평양 전쟁의 종식

jk-st 2023. 2. 6.
반응형

핵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무기를 만들었던 개발 프로젝트로 8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논란과 영화소재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결국 개발은 성공했고 그 살상력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여실히 입증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 연구원들
맨해튼 프로젝트 연구원들

맨해튼 프로젝트

Nuclear Weapon(핵무기) 프로젝트의 시작

프로젝트 명은 뉴욕 맨해튼 모임자리에서 계획되었다 하여 '맨해튼 프로젝트'를 그대로 사용했고 실제로는 맨해튼을 제외 한 미국 여러 지역에서 실행되었습니다. 1939년 아인슈타인의 한 통의 편지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소규모 연구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개발에 주도적인 역활을 했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포함하여 연구 종료 이전에는 총 13만 명으로 엄청난 규모의 프로젝트였습니다.

 

프로젝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시작하였고 루스벨트 사망 후 당선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당선되기 이전까지 이 계획을 모를 정도로 극비로 진행되었습니다.

 

총 개발비용은 현재 기준으로 255억 달러(한화 30조 원)가 소요되었고 개발기간은 1939년에 시작되어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에서 핵실험(트리니티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약 6년간의 연구개발은 종료되었습니다.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과 캐나다가 참여한 연합군에서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킬 무기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작하였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E=mc2로 유명한 특수상대성 이론을 기반으로 개발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으로 만들어진 핵무기를 보고 후회했으며 1955년에는 핵무기 반대성명까지 발표하기까지 했습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 폭발 이후 초토화된 나가사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 폭발 이후 초토화된 나가사키

최초의 핵무기 사용과  태평양 전쟁의 종식

핵폭탄은 독일을 상대로 사용하려 했지만 트리니티 실험 이전에 항복하여 그 대상은 일본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면서 일본에게 항복을 종용했지만, 항복 조건이 천황제 폐지이었던 터라 일본 군부와 일왕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폭탄명 : 리틀보이), 9일 나가사키(폭탄명 : 팻맨)에 핵폭탄이 투하되면서 그 살상력에 충격을 받은 일왕과 군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태평양 전쟁은 종식되었습니다.

 

8월 14일 일왕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면서 항복통보를 했고 9월 2일 도쿄만 요코하마항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 외무대신이 항복선언문에 사인하였습니다.

 

당시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는 군부 지도자인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7명을 전범 재판에 회부하여 교수형 시켰지만 일왕은 전범 재판에 회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미국이 일본을 통치하기에는 일왕의 존재가 더 이득이 되기에 살려두고 일왕에게는 일본 국민들에게 라디오를 통해 "나는 신이 아니고 신의 후예이며 단지 인간이다"라고 발표하게 했습니다. 일왕이 신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인들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 미국은 일본의 헌법을 다시 정립하면서 '일본의 주권은 일왕이 아닌 국민들에게 있다, 그리고 일왕은 상징적인 존재이다'라며 헌법을 개정하였습니다.

 

2022.06.15 - [분류 전체보기] - 인류 최악의 수소폭탄 '차르 봄바'

 

인류 최악의 수소폭탄 '차르 봄바'

인류 최악의 수소폭탄 ‘차르 봄바’, 이 폭탄의 이름을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황제 폭탄’입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 핵폭탄 위력의 마지막을 보여준 폭탄이며, 이 폭탄의 실험 이후 이

pico-jk.tistory.com

 

댓글